폭풍전야.

4시 40분 즈음에 일어난 내가 처음 한 생각이다.

전쟁을 앞두고, 적막한 고요만이 나를 감싼 채

난 집 앞에 잠시 산책을 하러 나갔다.

1년은 참 길었던 것이다.

1월에는 홀로 대치동에 올라와 생활하며 많은 것을 배웠고, 아팠다.

2월에는 부산에 내려와 익숙한 환경에서 공부하던 찰나, 코로나19가 상륙했고

학교를 못 가는 대신 비대면 수업이라는 개념이 떠도는 동안 

인강을 하루에 9~10시간 들었던 3~5월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6평 전을 해서 자만했던 내 자신, 그렇게 6평에서 받았던 국어 2등급.

정말 후회하고, 화가 났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냉철함을 잃지 않고 기출로 회귀한 7월

경찰대 시험을 준비하며, 극한의 모의고사를 처음 만들고, n제의 바다에 허우적댄 8월

실모로 실전력까지 겸비하며, 6평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9평.

그리고 그맘때 즈음해서 내 삶에 걸어들어온 W.

9평에서 국어 98점이라는 성과로 6평의 나 자신을 극복하는듯 했으나

실모에서 삐끗거리고, 간쓸개에서 오답이 너무 많이 나온 1주일을 거쳤다.

하지만 난 나를 믿었었고, 아무 생각없이 인풋을 더욱 늘렸다.

사설 국어 실모 1등급이 고정시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평균 순공이 14시간을 찍었을 때도 이즈음이었고, 

10모에서는 전국권의 성적을 거머쥘 수 있었다.

D-50의 점등식을 거치고, 

내 눈이 고장나기 시작한 D-20.

그러나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웠던 D-1.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거쳐 만들어진 D- DAY의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

유일했고, 자신있었다고 생각했다.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상처 자체가 아름다운 '나'

과거의 실수 따위 개의치 않았다. 아니 과거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과거의 실수는 현재의 나를 위한 발판이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르골이 돌아가듯, 머릿속에서 그려진 1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이런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난 텅 비어있다. 그러니까 제일 아름다운 것이다.'

집착하지 않으려는 나의 공허함이,

나다운 공부가 가지고 있는 자유로움이,

결국 가장 아름다운 과정이고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희망.

그것만큼 수능의 압박감을 이겨낼 수 있는 좋은 장치는 없었던 것 같다.

집에 들어와서, 늘상 하듯 냉샤워를 했다. 

그동안 틀어진 5개의 곡 (플리를 만들어놨고, 맴돌이를 부술려면 맨날 똑같은 노래만 들으면 된다는 판단)

HIGH HOPES - Panic! At The Disco

VVS - 머쉬베놈, 미란이

This is me - Keala Settle

Youngblood - 5 seconds of summer

Ice Cream - BLACKPINK

진취적인 곡을 들으며, 난 더욱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원래는 전날에 모든 가방을 싸놓고 자는 편이었지만,

내가 공부한 것들을 뿌듯이 여기고 싶은 생각에 책상 위에만 놔두어 놓은 상태였었다.

우선 전날 친 상상베오베 모의고사 5회차, 2021 6/9월 시험지를 예열 지문으로 삼았다. 

수학은 러셀 모고에서 1문제, 기출에서 1문제 (당시 17~20번 / 28번 정도의 난이도)의 예열문제를,

영어는 직접 선별한 7개의 지문과 어제 읽었던 20개 지문의 요약정리본,

생윤은 현자의 돌 모의고사 시즌 2 시험지를 들고 갔고,

사문은 10지선다 keypoint 종이 한 장만이 가방에 들어갔다. 

뭔가를 많이 담지 않은 이유는, 무거운 가방이 주는 중압감조차 컨트롤하겠다는 일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가방의 무게가 13kg ~ 15kg 정도 되었었는데 수능 당일에는 2kg도 채 되지 않았던 게 참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복장은 내가 가장 공부를 많이 해본 스타일로 갔다. 교복.

여기에 평소 가장 많이 먹어본 도시락이 담긴 통과 

전날 모의고사 OMR을 마킹했던 컴싸,

가장 많이 사용했던 HB 샤프심 한 통, (평가원 시험지에 가장 부드럽게 적히고 잘 지워지더라고요)

여분의 화이트와 지우개를 쑤셔넣은 외투.

화장실을 대비함과 동시에 수험장 책상과 의자를 조절하기 위한 여분의 휴지,

그리고 수험표와 민증, 내 모든 공부의 정수가 담긴 행동강령 1장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6시에 출발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엄마랑 수능 끝나면 어떤 기분일지를 얘기하면서,

차에서는 아까 들었던 5개의 노래가 담긴 플레이리스트가 은은하게 틀어진 채로

우린 19분을 달렸다.

마지막 노래가 딱 끝날 때, 마주한 수험장의 정문.

난 참 내 수험생활을 행운이라고 생각한 것이, 내 수험장이었던 해운대고등학교가

사실 중학교 시절 참 많이 간 곳이었기 때문이다. (산하재단의 중학교를 다녔었기에)

내부 구조나 책상 등에 익숙했고, 그 등굣길 또한 너무나 익숙했다.

정문 앞에서 고등학교 선생님 한 분이 덩실덩실 거리면서 서 계셨고, 악수를 하며 말씀하시기를

'상욱아, 내 딴 건 모르겠는데 말이다. 넌 우리 고등학교의 자랑이 될끼다 마.'

참 위안이 되었던 말이었었다. 구수한 사투리로 해주는 응원이 참 달다고 느꼈기에.

조금 더 올라가서 마주한 체온 측정기 앞에는 중학교 시절, 나와 친했던 선생님이 서 계셨다.

애석하게도, 노안은 세월에 구애받지 않는다. 단번에 날 알아보시더라.

'와따마, 니 상욱이 아이가? 니가 벌써 고3이가? 이야, 해운대중학교에 어? 이름을 날리뿌라.'

참 많은 생각이 드는 입성길이지 않을까. 

평소에 인성 좋게 살았던 것이 결국 어떤 식으로라도 보답받는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기억난다. 제 8시험장에 3번 창가자리.

햇살이 은은하게 들어오면서 바깥을 볼 수 있었던 자리였었다.

6시 30분에 교실에 들어올 수 있었고, 책가방만 놔둔 후 화장실의 위치와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곳을 모색했다.

전날 수험장에 코로나로 인한 출입 통제가 걸려 이러한 요건들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란스러울 수 있는 환경과 나 홀로 멘탈을 가다듬을 수 있는 장소는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담으로, 내가 있었던 수험장은 정말 아수라 그 자체였다. 이후에 더 자세한 썰을 풀도록 하겠다.)

화장실은 반 바로 앞이었으며, 1층에 조용한 공간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자리로 와 앉았다.

곧바로 계획했던 6, 9월 시험지를 펴서 읽기 시작했다. 현장의 흔적이 묻어있는 시험지말이다.

6평 시험지를 통해서는 '내가 어떤 행동들을 하면 안되는지'

9평 시험지를 통해서는 '내가 어떤 행동들을 해야 하는지'

에 대해서 복기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글의 구조나 근거를 찾는 방식에 대해서 되뇌였다.

그 다음으론 상상베오베 5회차 시험지를 꺼내 자신감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약간 허수의 마인드.

'야, 내가 누구야? 수능 전날에 국어 사설 실모 1컷 87짜리 100점 맞은 사람이야~'

이러면서 최대한 긴장감을 떨쳐내고 주변의 공기를 내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복기가 끝나고 나니, 손목시계가 7시 3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모든 템포가 나한테 맞춰 흘러간다는 것, 주변의 시간을 내가 지배한다는 느낌이랄까.

이제 내가 제일 자신있는 지문 1개와 신유형 지문 2개로 예열을 시작했다.

가장 자신있는 지문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가장 어려워'했던' 지문이었다.

이는 많은 수험생들에게 악몽으로 남은 '점유'지문 (2020 09) 인데

처음 풀었을 때, 5문제 중에 어휘 하나를 포함해 두 개만 맞았었던 기억은

언제, 어디서 풀어도 지문의 구조와 사고의 흐름을 잡을 수 있는 기억으로 덮여진 상태였다.

그리고 당해 9월에 '행정규제'지문으로 단(短)지문에 대한 경고를 해놨다고 판단한 바,

어떤 흐름으로 글을 읽어야 하는지를 명심함으로써 첫 번째 예열을 마칠 수 있었다.

신유형 2개는 당해 평가원이 출제했던 'OIS'카메라 지문과 '과거제' (가)(나)형 지문이었으며,

이 역시 정답의 근거를 찾는데 주목하기보다, 비슷한 유형의 글을 만났을 때 어떤 사고를 해야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모든 예열이 끝나니, 정확히 8시 10분이 되어 감독관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8시 20분까지 시험지를 배부받고는, 20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당도했다.

진짜 이때 내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생각도 나지가 않는다.

긴장감. 아니. 그걸로는 부족하다.

만약 1년동안 저지를 과오가 있다면, 아마 이 시간에 다 마음 속으로 기어들어오지 않을까.

갑자기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되기 시작했다. 머릿속은 새하얘졌고, 

거짓 하나없이 샤프를 쥔 손이 파르르 떨리더라.

나아가, 불안함이 엄습한 순간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가 어느샌가 시험을 알리는 타종이 울린다.

첫 화작 지문.

읽히지가 않았다. 진짜다.

원래 국어를 한다는 것은, '머리에 정보가 남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콩쥐팥쥐의 장독대 마냥 송송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정말 당황했고, 찰나였지만 모든 노력이 무산되는 것만 같았으나,

난 극한의 모의고사를 통해 이런 상황에 대비를 했었다.

다행히도 내 손과 머리가 기억하는 대처방법을 기억해냈고

난 그 상태에서 바로 시험지를 덮었다. 그리고 정확히 30초를 세었다.

그 시간동안 시험지에 대한 집착을 모두 놔줘야 온전한 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30초를 내준다고 등급이 바뀔 실력이었으면, 난 서울대 경제를 꿈꿀 자격도 없었다는 판단으로.

난 가만히 창가 벽돌담에 앉아있는 한 마리의 까치를 응시했다. 총총 뛰어다니다가 날라가는 새.

나도 12월 3일 이후론 한 마리의 새가 되어 날아가고프다는 희망을 품은 채, 다시 시험지를 폈다.

그때부터는 막힘이 없었다.

내가 연습했던 것이 통한 것이다! 수능이란 상황 속에서 손과 머리가 기계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후 평소 루틴대로 화작문, 문학, 독서 순서대로 풀었으며, 심지어는 중간에 단(短)지문이 있는 것을 보고는 

내가 세웠던 행동강령대로 수능을 이끌고 갈 수 있었다.

기술 지문은 세부 사항을 묻는다는 것에서 OIS지문과 유사했고,

(가)(나)형은 과거제를 통해 얻은 독해법으로 손쉽게 파훼되었지만,

그럼에도 현장 난이도가 난이도인지라 정말 불안했었던 기억이 있다.

문법 2문제와 문학 1문제 그리고 독서 3문제가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었으나

검토하면서 문법과 문학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고, 독서 1문제가 아리까리한 상태로 남은 채

첫 국어시간은 끝이 났다.

솔직히 말하면 개운한 시험은 아니었기에, 불안함을 가진 채로 곧바로 화장실로 가 찬 공기를 맞았다.

자, 여기서 아수라는 시작이었다.

모든 수험장이 이러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복도에서 여럿이 몰린 채로 답을 논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화장실빌런들은 볼 일을 보면서 답을 외기 시작했고,

그냥 정말 소란스러운 고등학교 1학년 교실을 보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아수라를 마주하니 멘탈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지만,

다행히 아침에 봐둔 조용한 장소로 가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제 친구들도 그 장소에 와서 같이 웃고 있는데,

한 친구가 답을 외기 시작하더라고요... 

걔가 저보다 6평은 훨씬 잘 치고, 9평도 비슷하게 친 실력파였기에 별 말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만,

답이 9개가 다르다는 사실을 듣고 정말 충격이 컸습니다.

신빙성 있는 팩트라는 생각에 진짜 머릿속이 착잡한 와중에도, 제 머릿속을 스쳐지는 생각 하나.

'아, 나 지금 수학도 못 치면 재수학원도 못 들어간다' 

때문에 정말 화가 난 채로 수학시험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시험지를 씹어먹을 각오로 시험에 임한다.'

시험지를 받자마자 파본 검사를 하면서 1~5번을 눈풀로 풀고,

20번 문제에서 4차함수의 정적분이 나오길래, 이를 식이 아니라 그래프로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21번 문제가 당해 9평에 나온 귀납법이라는 생각에, 29번 확통은 꼼꼼한 케이스 구분이 필요하다는 판단.

그리고 30번에서 3차함수의 특수 case를 그려보며 의심가는 한 가지 경우를 확정지을 수 있었다.

멍 때리는 20분 동안, 나는 1~5번을 검토하고, 21번의 식을 구상하며, 30번을 그렸는데

다 평소에 실모 오답을 하며 머릿속으로 킬러를 푸는 연습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10시 30분 종이 땡치자마자 저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푼 문제 중에 실수란 없다, 다 맞춘다는 각오로.

16번까지 가는데 10분도 안 걸렸고, 16번을 풀었는데 객관식에 답이 없는 것을 보고 당황하기는 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메아리가 들리더라.

'아니, 뭐. 한 번 즈음 꼬였겠지. 그냥 넘기고 다 풀고 다시 오자. 어차피 맞출 문제잖아'

그래서 과감하게 16번을 넘기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20번 전까지 정확히 12분 정도 걸렸었고, 20번 푸는데 3분, 21번 푸는데 2분 정도

그리고 28번 전까지 3~4분을 쓴 후, 28번에 1분, 29번에 3분, 30번에 4분을 투자해서 1회독을 마쳤다.

1회독 마친 후 손목시계가 11시를 가르키고 있었던 것이 기억나는데, 

시간을 합해보면 32분 정도가 나오니까 어림잡아 맞을 것이다.

누군 기믹이라 할 수도, 누군 거짓이라 칭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1년 간 해온 공부의 양과 질에게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결과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저 내 손과 머리가 기억하는대로 따라갔더니, 빠르고 정확한 풀이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분명히 실수나,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검토를 해야하지만,

그전에 내 루틴대로 찬 공기를 쐬는 것이 필요했다. 

수험장에서 창문을 제멋대로 여는 것은 남들에게 민폐가 될 수 있기에,

난 1회독을 마친 직후, 감독관님께 화장실 가는 것을 요청해 3분 동안 쉬고 들어올 수 있었다.

눈이 아픈 이후로, 안압이 올라가면 이후 컨디션이 문제가 생기기에 고안한 방법이었는데,

참 잘 먹힌 것 같다.

본디 수학 풀이과정에서 실수나 오류가 생길 때, 본인이 했던 풀이를 보는 것만큼 바보같은 짓이 없지 않은가.

왜?

어차피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똑같은 상황에서는.

때문에 나는 조금 쉬다가 문제를 다시 보는 것을 행동강령으로 삼았고,

다시 풀 때면 겉표지를 이용해 문제를 다시 적은 후, 새로 푸는 습관을 형성해놨었던 것이다.

(확통 점검 시, 정말 유용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아까 막혔던 16번을 다시 풀어냈고, 29번 확통을 검산한 후, 30번 그래프 경우의 수 모두를 그려 점검하고,

남은 시간에 모든 문제를 한 번 씩 검토한 후에 시계가 11시 50분을 가르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킹을 한 후에, 시간이 남았지만 난 내가 적은 답에 더 이상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내 비장의 수, [사탐 백지정리]를 시작했다.

이유는 단 하나, '사탐을 칠 때는 힘이 다한 시기일 것이기에 기계적인 판단과 개념정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남은 20분 동안 열심히 생윤 백지정리를 하고 (추후에 pdf로 올려드리겠습니다.)

수학시험이 끝이 났다.

자연스레 점심시간이 찾아왔고, 난 먹는데 익숙한 메뉴였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았다.

부담스럽지 않게 체력을 보충한 후, 바로 영어 ebs 지문 7개만 읽어주고

다시 생윤 복기에 집중했다. 

못다한 생윤 복기를 완료하고 나니 정확히 영어를 치를 시간이 되었고, 

정말 미안하게도 내 내면의 화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었다.

분노의 근거는 단순하다. '내가 1년을 했는데, 국어 찌라시에 그렇게 흔들려? 참나.'

이제는 모두가 알겠지만, 2021 대수능 영어는 올해와 다르게 정말 쉬운 편이었고,

시험장에서도 그게 체감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올해와 비교해서 말이다)

우선 나는 평소에도 영어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만큼 실력이 좋은 편임을 알아줬으면 한다.

내가 영어를 푸는 순서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영어 실모를 꺼내놓고 직접 따라와보자.

우선 영어 시험지의 표지를 뺀다. 괜히 좁은 책상에 짐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딴 과목도 마찬가지)

그리고 듣기가 들리는 순간부터 그대로 종이를 뒤집어 8페이지를 푼다. 43-45를 풀고 41-42 순으로.

아직 1페이지에 듣기가 머물러 있다면, 1페이지를 본 상태로 속지를 빼 5페이지가 드러나도록 접어준다. 그리고 25-28을 푼다.

주로 여기까지 하면 11번이 오는데, 11번 12번은 짧기 때문에 방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 두 문제를 넘기면 듣기가 2페이지로 넘어가기 때문에 옆에 있는 18번부터 20번을 푼 후, 여력이 될 때 22부터 더 푼다.

그런데 수능날의 내가 어떤 상태였는가? 그렇다. 스스로에게 분한 상태였다.

28번까지 풀었는데, 6번이 오고 있었던 것이 이를 방증해준다. 

그래서 옆에 29번과 30번을 봤는데, 이게 왠걸, 내가 내신 때 했던 지문이 떡 하니 놓여져 있었다.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답 두 개를 찍은 뒤 (조정식 선생님이 어휘로 나온다고 한 게 나왔었다)

31번과 32번도 학교 선생님이 예언한 한 문제와 내가 선별했던 한 지문이 먹음직스럽게 놓여있었다.

심지어 32번은 뚫은 그대로 나와서 시간이 걸렸다고 하기도 무색할 정도 였으며

31번은 말로 되뇌이다보니, 빈칸을 기억할 수 있어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진실된 노력과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삶이 언젠가는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몸소 체감한 순간.

듣기는 이제 9번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11번이 오기 전까지 29번과 30번을 검토한 후,

11번, 12번을 깔끔하게 쳐내고, 2페이지로 들어간 나는 적극적으로 18번부터 발췌독을 사용했다.

발췌독은 지양하는 것이 맞지만, 난 내 손과 머리가 기억하는대로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내 모든 공부는 '속도감 있게 치고 나간 후, 애매했던 것들을 다시 보는 것'에 방점을 두었기에,

발췌독을 하는 것에 사람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난 독고다이로 내 방법을 고수했다.

(p.s. 여러분들도 이런 태도와 깡을 지닌 채로 수험장에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D)

그 결과, 13 14 15를 들으면서 18-20, 그리고 22-23을 풀 수 있었고 

16-17 원트에 들은 후, 다시 나오는 시간에 24와 21을 풀음으로써,

듣기가 끝난 후 단 한 장이 남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았다.

단 한 번도 연습 때 이런 적이 없었는데, 감정을 잘 제어해서 추진력으로 승화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깔끔하게 나머지 영어 문제들을 푼 후, 듣기를 들으며 풀었던 것들을 다시 보고, 발췌독을 검토한 후

그대로 omr에 마킹을 마쳤다. 시간이 남았네? 당연히 사탐 백지정리를 할 차례인 것이다.

생윤은 점심시간에 마쳤기에, 간단히 키워드 위주로만 훑어주고

사문에서 도표 접근법을 간단히 정리해서 영어 꺼풀에 끄적거림을 마칠 때 즈음에 타종이 울렸다.

이때부터 완전히 흐름을 탄 것 같다. 

수능에서 모든 상황이 다 내 뜻대로 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 파도 위에 서핑하는 흐름 아니겠는가.

한국사 전까지 열심히 생윤 킬러단원 머릿속으로 되뇌이고, 사문 개방형 파훼법까지 복기한 후,

한국사 시험을 치뤘다. 

한국사는 정말 간단하게 3분 정도로 끝내고, 바로 27분 동안 생윤, 사문 총정리를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 마지막 폭풍을 대비한 쿨타임을 화장실에서 가지고!

10분 동안 사탐 선택지를 분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는데,

이거 사회 문화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슬쩍 내용을 보니

왠걸 가중평균 4칸짜리가 나와있고, 개방형과 도표의 길이와 난이도가 최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선 쟤는 나중에 찢는다는 생각으로 생윤형 머리를 꺼내는 데 일념을 다했다.

생윤형 머리란, 잡생각과 내가 똑똑하다는 착각을 모두 버리고 순전히 개념에 의거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막힘없이 시험을 끝내고, 검토를 2번한 후에 omr 마킹까지 끝낸 상태.

그 순간은 정말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탐구를 시작할 때부터 생각이 들었던 것인데,

'지금...1시간만 지나면, 1년 여정의 종착점인 것인가..?'

라는 상상이었다. 

오래달리기 혹은 셔틀런을 하다보면, 목표치 앞에서 가장 힘이 나게 된다고 한다.

결승선이 눈앞에 있는 나, 광명을 눈앞에 둔 동굴의 사나이.

설레면서도 두렵다.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 되는 것이니까.

사회 문화를 풀기 전, 나의 마음가짐은 확고했다.

'결승선을 앞두고, 스퍼트를 한 마라토너가 결국 금메달을 손에 쥔다. 포기하지 말자!'

타종이 울리고, 사문 시험지를 앞에 둔 채 2분 동안 고요히 눈을 감았다.

그리곤 (거짓 없이) 속으로 윤성훈 선생님을 불렀다.

그 까랑한 비음의 개그톤으로 나에게 힘을 주길. 도표는 정확하게, 개방형은 빠르게 헤쳐나갈 수 있길! 

이렇게 빌고서는 마지막 시험에 입장했다.

적극적으로 손가락걸기를 사용하고, 도표 문제들은 건들지 않은 채 나머지부터 해결했다.

정상적인 페이스로 시험이 따라와줬고, 도표 4개를 남긴 채

난 왠지 모르겠지만, 찬 바람을 쐬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아무 이유도 없었다.

잠시 찬 바람을 쐬고 싶었고, 그냥 가슴이 자꾸 나에게 차가움을 요했다.

그래서 1분 동안 열려 있는 창밖에서 바람을 느꼈다. 

참...많은 생각이 드는 1분이었다.

어쩌면 이후의 행적에 따라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없을수도,

또는 원하는 대학의 정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고민.

가만히 마음 속에서 2021년의 나 자신을 그려보았던 것 같다.

시옷자 정문 앞에서 웃고 있을련지, 아니면... 시옷자 정문을 바라만 보고 있을 것인지.

이때 전자가 선명해지게 된 이유는, 내가 전날에 했던 공부가 담긴 플래너였다.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뭔가 큰 위안이 되어주면서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가겠냐고!!!'

라는 외마디 외침을 마음 속에서 외친 후,

15분을 남긴 채 도표 4문제를 마주했다.

다행히도 윤성훈 선생님 실전모의고사에서 마주했던 것들이 많았고, 행동강령이 손과 머리에 박힌 나는,

순조롭게 사회문화를 끝내며, 웃음을 머금을 수 있었다.

(참고로 20번 도표 문제가 답이 1번인 거, 손가락걸기해서 고민하지 않고 대할 수 있었습니다.)

제2외국어는 탈주자가 정말 많아서, 수능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집에서 수능완성 실전모의고사 하나 푼다고 생각하고 대할 수 있었기에, 무리없이 마칠 수 있었다.

모든 전쟁이 끝나고, 엄마 차를 탄 나는 바로 평가원 사이트에 들어가 국어를 체크했다.

아침에 들었던 9개 중 7개는 내가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p.s. 가채점표는 적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에 한 문제라도 더 보고 맞추자는 심산이었어요.)

정말 큰 안도의 한숨, 그리고 눈물.

잘 버텨왔다는, 내가 나를 믿어줬다는 사실에 그냥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의 수험생활은 막을 내렸고, 

2021년의 나는 그 명맥을 이어받아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다.

Killing point > 

수능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외투를 벗고자 하니,

외투가 없었다.

그렇다. 

수능장에 놔두고 온 것이다 ㅠㅡㅜ

더군다나 도시락통도 놔두고 와서, 엄마한테 쓴소리 좀 듣고

다시 운전해서 수능장을 간 후, 찾을 수 있었다.

이게 참 감회가 새로웠던 것 같다.

정확히 12시간 전의 분위기는 치열함과 냉철함의 사이, 그 어딘가였다.

긴장감과 불안감이 날 짓누르는 공기였는데,

수능이 다 끝나고 수능장을 가보니, 

그렇게 가벼운 공기가 있을 수가 없더라. 

산뜻한 발걸음으로 수능장 모두를 답보한 뒤, 힘차게 걸어나온 기억이 있다.

Killing point 2 >

혹시나 9개가 다른 친구를 걱정할 사람이 있을까봐 말씀드린다.

걔는 홀수였고, 나는 짝수형이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게 참 다행이었던 것 같다.

Killing point 3 >

시험시간에 화장실을 가는 것을 감독관에 따라 허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럴 때 정말 '교복을 입은 것'이 하나의 징표가 된다.

'나 모범생이에요'라고 증명할 수 있는.

실제로 n수를 하시는 선배도 교복을 입고 오셨던 기억이 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