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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즐거운 편지

이름 : 이강  스크랩
등록일 :
2023-03-26 12:5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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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
20,488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선생님들께 보내는 마지막 즐거운 편지, 18기 목표달성 장학생 이강입니다.

 목차

1. 과하지욕(袴下之辱)

2. 라그나로크 (Ragnarok)

2.1. 안 될 줄 알면서도 하는 자 (知其不可而爲之者)

2.2.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다 (士爲知己者死)

3. 내 위에 있는 별로 가득찬 하늘 (Der bestirnte Himmel über mir)

4. 방황할 권리 (Allesmansträtten)


  벌써 1년만이네요. 제가 교정을 거닐며 봄바람을 맞기 시작한 것도 얼마 안 된 것 같고, 매화를 보면서 '그래, 이제 3월이구나!'하고 외친 것도 얼마 안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잠시 주말을 보내러 집에 왔다가, 핀 매화를 보고 다시금 기분이 좋아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신기하네요. 정말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두 학기가 끝나고, 또다시 3학기째 대학에 있다는 것은. 그리고 저에게도 두 명의 짝후배가 생겨서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선생님들께 한 달에 한 번씩 편지를 올린 것도 1년이 다 되어갑니다. 수능 호외라고 냈던 편지를 포함하여, 이번 편지까지 열두 편. 부족하다면 부족한 이 편지들을 다시금 읽어보면서 더 좋은 편지일 수는 없었을까, 생각해 보곤 한답니다.
 이번 달에는 '작별인사'를 드리게 되었네요. '마지막 인사'기도 합니다. 이번 달에는, 그래도 1년을 밀어왔던 저의 캐치프레이즈, '즐거운 편지'의 이름에 걸맞게, 즐겁게 작성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는 삶의 방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삶의 방향에서 선생님들께서도 얻어가는 것이 있기를 조금이나마 바랍니다. 이번엔 마치 누군가에게 정말로 보내는 편지같은 느낌이 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오랜만에, 그리고 어쩌면 처음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실 수 있는 편지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 과하지욕(袴下之辱)

 어렸을 때, 초한지는 삼국지 다음으로 매력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삼국지만큼은 아니지만, 영웅호걸의 이야기도 많이 나오잖아요. 뿐만 아니라 한나라로 귀결되면서도 모두의 말로가 좋지는 않은, 느와르와 비슷한 서사를 따라가기 때문에 흥미롭게 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초한지에서 제일 저의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은 무력이 뛰어난 항우도, 최후의 승자인 유방도 아니었습니다. 한신(韓信)이었습니다. 머리가 비상하고 자신만만하며, 그러나 결국은 때를 놓쳐 파멸하는 아름다운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충분히 1인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결국 2인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한신은 제가 가장 되고 싶어하는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다시 보면서 제가 재평가하고 있는 장량(장자방)과 더불어 2인자의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한신은 너무 유명해서, 여러 고사성어를 양산해내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다다익선'이라던가, '토사구팽'이라던가. 아, '배수진'도 있군요. 그 많은 고사성어 중, 저에게 한신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고사성어는 '과하지욕(袴下之辱)'입니다.
 '과하지욕'은, 한신이 불량배의 가랑이 아래를 기어가는 치욕을 겪었던 일을 의미합니다. 한신이 길을 가다가 불량배를 만났습니다. 불량배는 한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겁쟁이라고 매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신에게 두 가지 선택권을 줍니다. 용기가 있다면 자신을 칼로 찔러볼 것, 그럴 용기가 없다면 자신의 가랑이 아래로 기어서 지나갈 것. 한신은 기어가는 것을 선택합니다. 훗날 성공한 후, 한신은 그때를 기억하며 잠깐 치욕을 참은 것이 자신을 성공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라고 했다고 하죠. 순간 욱해서 한신이 그 불량배를 정말로 찔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마 살인자가 되어 쫓겼을 것이고, 훗날 한나라의 진영에 들어갈 수 없게 되겠죠. 그랬다면 '천하통일'에 힘을 보탤 수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아는 한신의 신화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과하지욕'을 들고 온 것이 비겁하게 살자는 뜻은 아니겠지요? '과하지욕'의 고사는 우리에게 두 가지 정도 시사하는 바가 있어서 들고 온 것입니다.
 '과하지욕'을 직관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은, 정말 해석되는 뜻처럼 '순간의 치욕을 참아야 한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치욕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아닙니다. 나를 부끄럽게 하는 모든 것은 사실 저에게 치욕이지요. 친구들이 저에 대해 '소문'을 만든다거나, 저를 명시적으로 괴롭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 정도의 '치욕'이면 참으면 안 되겠지요. '순간'의 치욕은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유발하는 행동을 기반으로 설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왜 그랬나, 후회하게 만드는 화냄 정도만 유발합니다. 그러니까, 친구가 아무 생각없이 툭 던진 한 마디, 예를 들어 나의 의견을 '무시'하는 행동이 있겠군요. 저는 고등학교 때,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그게 무엇이냐며 무시하면 많이 화냈던 기억이 있어요. 대학생이 되고, 점점 그 친구가 주장했던 방향으로도 생각하게 되면서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주장이 항상 옳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되, 너무 반대되는 사람을 몰아붙이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같이 '가벼움'의 시대에는, 저는 그렇게 했다가 이른바 '급발진'이라고 비판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웃자고 하는 이야기에는 웃으면서 넘겨주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정도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요. 그렇게 해야 그 친구보다 더 '쿨'하고 센스 있게 남을 수 있잖아요. 요즘 저는 정말 싫어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욕하지 않으려고 한답니다. 어렸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점점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서 제가 욕했던 사람들을 점점 닮아가게 되더라고요. 미래의 저를 욕하는 모양새라, 좀 꺼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과하지욕'을 저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봤을 때, '순간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량배가 한신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죠. 하나는 알량한 용기를 위해 자신을 찔러볼 것, 하나는 지금 굉장히 치욕스럽게 가랑이 사이를 기어갈 것. 제가 '지금'을 살아가는 것을 강조했었죠. 하지만 '지금'을 살아간다고, 명예를 위해 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신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은, 사실 아주 의미있는 순간이고 어쩌면 인생을 결정지을 수 있는 '순간'입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즉시, 그 선택은 '불가역적'이 됩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알맞은 미래를 계속 살아나가겠지요. 우리는 후자가 선택된 우주를 살고 있습니다. 만약 전자가 선택된 우주라면, 우리는 초한지에서 한신의 이름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을 산다는 것은 '지금만'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깨닫고, 충실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다음에는 '이후'가 있고, 또 거기에는 '이후'가 있고, 계속 연쇄해서 일어나죠. 마치 바둑이나 테트리스 같은 것입니다. 지금 잘못 놓은 한 수, 지금 잘못 내린 블록 하나는 후의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기반이 됩니다. 그러니까 '순간'이 제일 중요하죠. '지금'을 살아가면서도, 이후에 대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의 집합으로써 살아가는 삶, 그게 바로 초인의 삶이 아닐까요.

2. 라그나로크 (Ragnarok)

 제가 쓴 에세이들을 돌아보며, 저의 문학에 흐르고 있는 분위기를 세 사상으로 정리해 본 적이 있습니다. '계몽주의', '낭만주의', '패배주의'가 그것입니다. 저의 모든 문학 작품은 이 세 가지 사상의 조합 3C2중 하나로 설명할 수 있더군요. '계몽주의적 낭만주의', '낭만주의적 패배주의'처럼 말이지요. 이 발견을 친구들과 논의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어느 정도 이해를 하던데, '패배주의'라는 단어를 많이 혼란스러워 하더군요. 패배주의란, 안 될 게 뻔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저의 '패배주의' 역시 그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패배주의'는 안 될 것이 뻔하기에 포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제가 문학에서 추구하고 있는 방향은 안 될 게 뻔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직접 그것과 충돌하는 것, 그리고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파멸에 대한 낭만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같은 과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저의 '패배주의'가 단어 선정의 모호함이 있다고 지적하더군요. 그 친구는 북유럽 신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저의 성격상 제가 북유럽 신화를 좋아할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제가 라그나로크를 기다리는 신들을 동경하는 게 아니냐면서요. 북유럽 신화는 결국 이미 정해져 있던 라그나로크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그나로크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운명'이지요. 오딘의 아들 발두르는 태어나기 전부터, 라그나로크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발두르가 죽는다면, 라그나로크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신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죽을지 알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죽음의 방식까지 모두 정해져 있지요. 신들은 계속 그들의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신탁은 성립하게 되고, 모두가 연극의 등장인물들처럼 예정된 행동으로 예정된 죽음을 맞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노력하기 때문에, 그들의 운명을 바꾸려는 노력 그 자체가 멋진 것이지요. 비록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을 압도하는 것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기려고 노력하는 모습,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결국 깨어지는 모습, 거기에서 저는 아름다움과 낭만을 느낍니다. 뭐, 일명 '4대미'로 분류하자면 '비장미' 정도로 볼 수 있겠네요. 

2.1. 안 될 줄 알면서도 하는 자 (知其不可而爲之者)

 '라그나로크 증후군'을 보여주는 현자가 동양에도 있습니다. 유교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공자(孔子)가 대표적이지요. 제가 한창 '패배주의의 비장함'에 빠져있을 때, 지식인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언뜻 읽었던 '지기불가이위지자'(知其不可而爲之者)의 고사가 생각났지요. 공자를 지칭하는 이 표현, '안 될 줄 알면서도 하는 자'는 제가 가장 듣고 싶은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석문(石門)이라는 곳에 다다랐을 때, 새벽이었습니다. 새벽이었으니까 얼굴이 잘 안 보였겠지요. 문지기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라고요. 신분을 확실히 해야 관문을 통과시켜 줄 수 있겠지요. 그러자 자로는 '공자 씨의 제자요.'라고 말했다죠. 그러자 문지기가 말하기를, '아, 안 될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 아닙니까.'라고 반문했다고 하죠.
 지식인은 그런 사람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그것이 바로 지식인에게 내려진 저주죠. 말한다고 지켜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알아낸 '진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지식인입니다. 제가 제일 동경하는 이상향이면서도,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상이기도 합니다. 저는 겁이 많아요. 제가 알게 된 진리를 계속 지키고 있을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저를 평가하는 방식은 보통 이강백 선생님의 희곡 <파수꾼>에 나오는 '파수꾼 다'입니다. 보통 그 파수꾼에 저를 비유하곤 한답니다. 늑대가 없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어떤 이유일지 결국 침묵을 지키고 북을 두드리는 마지막 장면. 그것이죠. 그 우수 어린 양철북 소리. 폴란드의 저항가요 <야넥 비시니예프스키가 쓰러졌다>를 들으면서, 제가 가장 슬퍼했던 소절도 그와 비슷했습니다. '비록 세상은 모든 것을 알게 되었지만, 절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음,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라, 그것이 제가 나아갈 수밖에 없는 길일지.

2.2.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다 (士爲知己者死)

 그러고 보니까, 제가 원래 지식인을 생각할 때 좋아하던 구절은 따로 있었습니다. 이른바 '사위지기자사'라는 이번 소절의 소제목과 같은 구절입니다. 뜻은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다'라는 뜻이죠. 전국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대표적인 사건은 진(晉)이 한(韓), 위(魏), 조(趙)의 삼국으로 분열될 때입니다. 그때 진나라에서 싸우던 가문 중 지(智/知)씨를 섬기던 예양(預讓)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씨의 수장 지요(지백)만이 자신을 선비로 여겼다며 충성을 다하던 예양은, 지백이 조씨의 무휼(조양자)에게 죽고 모욕당하자 조양자를 암살하기 위해 죄인으로 변장하여 호시탐탐 노리다가 결국 발각됩니다. 그러나 조양자는 예양의 충성에 감탄하여 살려주었습니다. 살아난 예양은 암살을 포기하지 않고, 숯을 먹고 옻을 얼굴에 발라 자신의 외양을 완전히 바꾸게 됩니다. 이때 친구가 왜 그렇게까지 하여 복수를 해야 하느냐고 묻자, 예양은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사마천이 쓴 《사기》의 <자객열전>을 읽을 때면 그 '자객'들을 응원하면서 읽었던 것 같아요. 어찌 보면 암살이라는 것을 함에도 불구하고 제가 예양이나, 형가나,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감동했던 것은, 그렇게 하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이루는 모습을 높이 샀기 때문일 겁니다. 돈을 받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그 자객들은 돈만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이른바 '청부업자'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예양 같은 경우는 자신에게서 뜻이 직접 우러나온 목표였죠. <자객열전>의 주인공들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까지 의리를 지키려는 그 모습이 저에게 감동을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사위지기자사'라는 구절을 더 이상 동경하지는 않습니다. '의리'는 좋지만, 만약 자신을 선비로 알아주던 사람이 보편적으로 나쁜 사람일 때도 그 사람을 위해 죽는 일까지 해야 할까요. 글쎄요. 결국 그런 낭만적인 '선비'로 보이는 것은 결과론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후대의 평가에 근거해 하게 되는 것이지요. 나치나 제국주의 일본에 영합한 사람들은 현대(후대)의 시각으로 보면, 용서할 수 없는 전쟁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입니다. 그때 당시의 생각이 있었다고 반박될지 몰라도, 한 나라의 영광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한 사람들을 '선비'라고 보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당대에는 '의리'로, '논리'로 설명되었던 행동들도 결국 나쁜 결과를 몰고 오는 일은 많은 경우를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까지도 자신을 알아주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심지어 자신이 그 '알아준 사람'의 생각과 다른 경우에도 그러한다는 것은, 너무도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예양의 의리와 낭만은 존중해 주어야겠지만, 항상 그런 삶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때문일지 몰라도, 예양의 고사는 그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양은 다리 밑에 숨어 조양자를 죽이려고 하지만, 말이 살기를 느끼는 바람에 암살에 다시 실패합니다. 결국 예양은 조양자를 대면해 그를 죽이는 대신, 옷이라도 벨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을 하게 되고 그 청이 받아들여지자 옷을 벤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예양의 '선비관'은 우리에게 의협심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옳지 않은 일을 향하여 노력한다면, 그것을 이루는 것 역시 부당한 일일 것입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음까지 무릅쓸 때, 정말 그 '알아주는 사람'이 추구하는 바 역시도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예양이 되려다가 아이히만 같은 결말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지요.

3. 내 위에 있는 별로 가득찬 하늘 (Der bestirnte Himmel über mir)

 잠시 서양의 말들로 가 볼까요. 칸트의 묘비명의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Zwei Dinge erfüllen das Gemüth mit immer neuer und zunehmender Bewunderung und Ehrfurcht, je öfter und anhaltender sich das Nachdenken damit beschäftigt: Der bestirnte Himmel über mir und das moralische Gesetz in mir.' 《실천이성비판》의 한 문장이기도 한 이 묘비명을 번역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더 자주, 그리고 더 부단히 그것들에 대해 고민해 볼 때, 마음을 항상 새롭고 높아지는 동경과 경외심으로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으니, 그것들은 내 위에 있는 별로 가득찬 하늘과 내 안에 있는 도덕 법칙.' (Two things fill the mind with ever new and increasing admiration and awe, the more often and steadily we reflect upon them: the starry heavens above me and the moral law within me.; Columbia Collge Homepage, 영어에서 중역했습니다.) 지난 학기에 철학 수업에서 《실천이성비판》의 내용에 대해 배울 때, 교수님께서 잠시 쉬어가는 말씀으로 이 문장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웃으시면서 농담처럼 한 마디 던지셨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사신 분이죠.' 사실 칸트 선생은 아름답게 살던, 인간 사회에 대해 어느 정도 순수한 믿음이 있던 사람이라고 생각되긴 합니다. 별로 가득찬 하늘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있고, 내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을 재고해 볼 수 있는 여가가 있으셨던 분이니까요. 하지만 이 '내 위에 별로 가득찬 하늘'이라는 구절은 제가 1년 동안 편지에 적어왔던 방향과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편지의 주제인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저 자신에게 물어봤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서양의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 문장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때, 두 가지 정도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여유'입니다. 별들이 총총 박혀 있는 밤하늘을 잠깐이라도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보자는 것이지요. 어떤 루틴 만들기 애플리케이션에서 '하루 한 번 하늘 바라보기'라는 도전 과제를 보았을 때,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정도의 사소한 일까지 루틴으로 만들어야 하는 세상에 당황했던 걸까요. 저는 하늘을 바라보고 살려고 노력합니다. 올해 어느 날, 매화를 보다가 사진을 찍었어요. 푸른 하늘과 함께, 밑에서 보았을 때 하늘을 수놓고 있는 매화들이 아름다워서였죠. 그 날 수업이 다 끝나고 내려오는데, 저녁에는 구름이 약간 끼고, 또 어둑어둑한 하늘을 장식하고 있는 같은 장소의 매화를 보았습니다. 저는 그 사진도 찍었어요. 그리고 SNS에 두 사진을 동시에 올리면서 <인상, 매화>라는 장난스러운 이름까지 붙였죠. 여기에서도 보여드릴게요.



두 번째는 '꿈'입니다. 멘탈 관리 칼럼에서 제가 잠시 《데미안》의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있었죠. 그 때 했던 말과 어느 정도 겹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별'은 보통 자신의 목표를 비유할 때 자주 쓰는 말입니다. 이룰 수 있는 목표, 자기가 정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생각하고 의심없이 그곳을 향하여 달려갈 때, 우리는 결국 별과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죠. 저에게도 고등학교 시절 '별'이 있었습니다. 물론 항상 말씀드렸다시피, 제 '별'은 저를 향하지 않고 타인을 향하고 있었죠. 저는 결국 《데미안》의 에바 부인이 말했던 것처럼 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별을 향하여 몸을 던지면서도, 끊임없이 저를 의심하고 또 안 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최근에 저는 그 '별'을 수정했습니다. 제가 정말 행복한 게 무엇일까 떠올려 본 것이지요. 친구와 이야기하며 캠퍼스를 거닐면서, 저는 언제까지고 이럴 수만 있다면, 행복이라는 것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까지고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학문의 모임, 그것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너무 저에게는 머나먼 '별'일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정도 '별'이라면야, 교정을 거닐며 크툴루 신화와 북유럽 신화를 이야기해 보는 것이야말로, 제가 대학에 와서 정말로 해 보고 싶었던 일이 아닐지.

4. 방황할 권리 (Allesmansträtten)

 어느 날 라디오를 듣다가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들었습니다. 음악 제목은 결국 찾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 음악과 함께 나왔던 라디오 DJ의 멘트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단어이기도 해요. 'Allesmansträtten, 방황할 권리.' 노르웨이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쪽 국가에는 숲이 많습니다. 자연환경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나라이기도 하지요. (그레타 툰베리가 스웨덴 사람이지요?) 그래서 노르웨이에서는 자연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한, 누구든지 숲에서 돌아다니고 어디서나 야영할 권리, 즉 '방황권'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정말 여유로운 사람들이에요. 그 동안 스칸디나비아의 아름다운 제도들을 보면서 동경을 품어왔지만, 가장 아름다운 권리, 가장 낭만적인 권리는 이 '방황권'이 아닐까요.
 물론 저는 이 '방황할 권리'가 물리적 자연으로 한정지어지지 않는다고 보고 싶습니다. 정신적으로도 '방황할 권리'는 필요해요. 저는 지금도 방황하고 있습니다. 큰 꿈을 안고 대학교에 입학했고, 1년간 정말 피말리는 학점 경쟁을 견뎌낸 결과 번아웃이 온 것이지요. 1주일에 한 번씩 나오는 과제, 우리에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평가 방식... 지난 학기 말부터 천천히 쌓아왔던 번아웃은 이번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불안으로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글을 잘 썼는데, 나는 문학 분석도 잘했었는데... 왜 요즘은, 왜 요즘은, 앞으로 못 나가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에 하루하루 힘들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른바 '대2병', 소포모어 징크스가 나타난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선생님들께 이것은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번 미국소설 강좌를 들으며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가 무서워하고 머리에 그리는 일들은 대부분 아직 안 일어난 일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안 일어날 가능성이 큰 것도 여러 가지 있다.'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확대하여 크게 미리 겪어보는 덕분에, 실제로 현재에서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나고 있더군요. 제가 '지난 학기 과제가 너무 힘들었어요, 혹시 못 내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많이 했답니다.'라는 말을 했을 때 누군가가 저에게 그렇게 물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과제는 내지 못했니?' 저는 대답했죠. '아니요. 결국은 써서 냈죠.' 그것을 말하면서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나름 제 삶에 울림을 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도 현재 방황하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그런 분들께 정신적인 Allesmanträtten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위에서 말한 과 친구와 하루는 걸어가면서 저 '방황할 권리'를 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친구가 말하더군요. '톨킨의 말이 생각나네. '모든 방랑자가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 들으면서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더 나아가 '모든 방랑자는 길을 잃지 않았다.'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방랑자는 길을 잃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고정된 하나의 답, 고정된 하나의 목표만을 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자신에게서 우러나오는 대답, 자기가 정말로 가고 싶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계속 바뀌더라도 말이지요. 그러면 결국 모든 길은 잠재적인 길이 됩니다. 발이 닿는 곳으로 걸어가는 인생, 마음대로 살지는 않지만 또 너무 억제되지도 않은 인생, 모든 곳을 길로 만들어버리는 인생. 그 인생이 바로 방랑자의 삶이고, 그가 길을 잃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라디오에서 듣고 나서 빠졌던, 몇 달을 계속 듣고 다녔던 이탈리아의 <Vagabondo>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후렴구의 가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Vagabondo, vagabondo / Qualche santo mi guidera / Ho venduto le mie scarpe / Per un miglio di liberta / Da soli non si vive / Senza amore non moriro / Vagabondo, sto sognando, delirando.'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방랑자여, 방랑자여. 몇몇의 성자들이 저를 인도해 줄 테지요. 저는 자유를 위한 대장정을 위해 저의 신까지 팔아버렸답니다. 혼자 살 수는 없으니, 사랑이 없다면 죽지도 않을 테지요. 방랑자여, 나는 꿈을 꾸고 있어요, 빗나가고 있답니다.' 그렇죠. 방랑자는 결국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계속 빗나가고 있더라도, 그것이 바로 방랑자의 다른 정의이기도 하지요. 누구든지 방황할 권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저에게도, 그리고 선생님들께도 항상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요.

 벌써 마지막 즐거운 편지네요. 처음 시작하던 날, 어떻게 선생님들께 저를 표현할 수 있을까, 많이 걱정했답니다. 그닥 내세울 것도 없었고, 딱히 공부법이라고 할 것도 없는 제가 어떻게 선생님들께 조언을 드릴 수 있을까요. 제가 한 방법들을 소개해 드리면서, 제가 말씀드리는 방법이 정답이 아닌데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제 칼럼에 중요 포인트는 두 개 정도일 것입니다. 첫 번째로 가장 많은 선생님들이 관심을 가져주셨던 세특 칼럼과, 아주 많은 선생님들께서 공감을 표현해 주셨던 멘탈 관리 칼럼. 멘탈 관리 칼럼 이후, 저의 기조는 약간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들의 '공부'에 도움이 되는 칼럼보다는, 어떻게 하면 선생님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드릴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능을 향해 달려오셨던 선생님들의 종착점과 수능을 향해 달려가실 선생님들의 시작점 사이의 붕 뜬 공간에서, 제가 드리고 싶었던 조언은 '어떻게?' 였습니다. 한 달마다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들에 '어떻게?'라는 질문을 달고 항상 고민했죠. 어떻게 이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기간을 잘 보낼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한 저의 대답을 항상 써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요즘 글이 안 써진다고는 해도, 저에게 유일한 창구는 '글쓰기'였거든요.
 지금까지 선생님들께 즐거운 편지를 쓰면서, 저 역시도 많이 성장했습니다. 몇 가지는 제가 했던 것이라고 해도, 사실 대다수의 조언은 제가 저한테 해 주는 느낌이었거든요. 어쩌면 선생님들께 드리는 조언은, 많이 아는 사람이 해 주는 충고라기보다는, 선생님들과 같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나아가며 계속 깨지고 있는 한 개인이 원하는 자기 자신을 선생님들께 보여드린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만약 저 선생님들이 2년 전의 나였다면, 내가 정말 2년 전의 이강에게 해 주고 싶은 말들. 어쩌면 제 글의 1차 독자는, 결코 이 글을 읽을 수 없는 2년 전의 저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1년간 과분한 관심과 애정 감사했습니다. 항상 즐거운 편지라는 제목과 브랜드를 달고 써 보려고 해도, 천성상 '즐겁게' 읽을 수 있는 편지를 썼는지는 항상 의문이랍니다. 그래도 1년간 변함없는 응원과 감사한 댓글들을 달아주셔서 고맙다는 인사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저는 서면으로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이겠지요?

세 줄 요약
1. 순간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이후를 생각하는 순간을 계속 살아가길.
2. 안 될 줄 알면서도, 깨질 줄 알면서도 부딪는 아름다운 삶.
3. 우리 모두 방랑자가 되자, 그리고 항상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지자.
+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저한테도 많이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답니다.

 제가 이 칼럼을 시작할 때, 칼럼의 제목을 시와 라디오 방송에서 따서 지었다는 이야기를 했었죠.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 그리고 김이나 작사가의 옛 라디오 방송 <밤편지>, 이렇게 두 가지였다고요. 얼마 전, <밤편지> 마지막 방송의 클로징 멘트를 다시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마지막 편지도 그렇게 끝을 맺어보려고요. 물론 끝나기 전에, 황동규 시인께도 하나의 경의를 바쳐야겠지요. 언젠가 선생님들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이죠.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고 있겠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저는, 이강이었습니다.

2023년 03월 26일,
최고의 행운이 가득하시기를 빌며,
이강 올림.
  • 이강
멘토

서울대

이강 멘토

  • ○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22학번
  • ○ 인문계열 / 수시전형
  • ○ 메가스터디 18기 목표달성 장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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