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수험생 여러분.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간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20기 목표 달성 장학생, 서울대학교 의예과 이규현입니다.

제게 메일을 보내주신 수험생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동갑내기 과외하기’ 칼럼을 인상 깊게 읽으셨다는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해당 칼럼에 등장하는 호텔의 투숙객이나 Y와 관련된 후일담을 다루어 달라는 요청도 여럿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투숙객과는 연이 끊어진지 오래고, 칼럼을 읽고 Y가 누군지 알아채신 분들도 제법 계셔서 그들과의 이야기를 더 다루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이번 칼럼에서는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시간적 배경인 24년 1월 이전의 이야기를 속편처럼 들려드릴까 합니다. 제가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가던 시기인, 22-23년에 있었던 여러 일들과 당시에 했던 생각들을 기억을 더듬어가며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저의 고2 2학기(22년 2학기)는 모든 것이 불확실했던 시기였습니다. 내신은 전교 2등으로 추천서를 받기는 힘들었고, 생활기록부는 왠지 모르게 밋밋하기만 했으며, 서울의대에 갈 수 있을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내신 경쟁의 부담은 무거웠고, 멀리서는 수능이 다가오고 있었으며, 공동교육과정에서 마주친 K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고2 2학기는 수학여행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중간고사가 끝난 뒤, 해맑은 친구들은 제각각 어디로 수학여행을 갈지, 누구와 조를 짜서 다닐지 킬킬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한편 중간고사에서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표를 받아든 저는, 이대로라면 맨날 놀아도 성적이 잘 나왔던 전교 1등을 결코 이길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의대로 가는 길목은 2명이 가기에는 턱없이 좁았고, 전교 1등을 하지 못하면 추천서를 받을 수 없었기에 더욱 절박하게 공부에 임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저는 수학여행을 포기한 채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하는 선택을 했고, 배신하지 않는 노력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불러오며 저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습니다.

모두가 수학여행을 떠났던 시기 동안, 홀로 학교에 남아서 공부했던 경험은 생각보다 즐거웠습니다. 텅 빈 교실에서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복잡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가다, 머리가 아플 때면 밖으로 나가 시원한 가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걸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것도 좋았지만, 이때만큼은 자유롭게 시간을 배분하여 필요한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간혹 위 학년 선배들이나 아래 학년 후배들이 저를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저는 온전히 학업에 쏟을 수 있었던 시간을 즐기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때쯤이었습니다. 평소에도 마음이 힘들 때면 강릉으로 며칠간 훌쩍 떠나고는 했는데, 제가 바라본 경포 호수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작품이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어 놀랐습니다. 당시 제 통장에는 국밥 한 그릇을 간신히 사먹을 정도의 금액만이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학생에게는 제법 큰 규모의 상금이 들어와서 읽고 싶던 책을 마음껏 샀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문학상 수상 기사에 실을 만한 증명사진이 없었기에, 친구들이 기숙사에서 휴대전화로 급하게 사진을 찍어주었던 웃지 못 할 기억도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저 좋아해서 시작했던 문학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경제적 어려움도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어서 정말이지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2 2학기가 마무리되고 겨울방학이 시작되었을 무렵, 저는 기숙학원으로 홀연히 떠나게 되었습니다. 많이 따라잡았지만 여전히 전교 1등과의 내신 격차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학업에만 집중해도 끊임없이 부족함을 느끼던 때였습니다. 12월 31일, 기숙학원으로 가는 차에 몸을 싣기 직전 K에게 문자라도 남겼어야 했나 고민했지만, 서로의 미래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을까요, 많은 것을 뒤로 하고 입소했던 기숙학원에 낯익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온몸에 시커먼 거적때기를 걸치고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제 앞에서, K가 화사한 코트를 입은 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기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그만 고개를 돌린 채 자리를 피하고 말았습니다. 기숙학원에 입소했던 첫날, 낯선 잠자리 때문이었는지, 어색한 룸메이트 때문이었는지,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는지... 저는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습니다.

기숙학원의 둘째 날부터는 학원에서 나눠준 단체복을 입고 생활해야 했습니다. 패션에는 그다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칙칙한 단체복을 입고 학생들 무리에 섞여 정신없이 아침을 먹은 뒤, 곧장 자연1반 교실로 향했습니다. 일찍 도착한 자연1반 교실은 한적했지만,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K였습니다.

설마 하는 생각은 했었지만, 정말로 저와 같은 자연1반에서 수업을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마음이 요동쳤습니다. 남녀 간의 대화가 엄격하게 금지된 분위기였지만 저는 용기를 내어 K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러나 K는 제 인사를 차갑게 무시했고, 마침 자연1반의 생활지도 선생님께서 들어오시며 저에게 따끔하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몇 분간의 지겨운 설교를 들은 뒤, 저는 힘없이 자리에 앉아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국어 주간지를 풀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이동수업을 들을 때나 밥을 먹으러 갈 때 K를 종종 마주쳤지만, 그때마다 K는 저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저 지나쳐갈 뿐이었습니다. 저 역시 학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K의 행동을 존중하며 제가 할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빠르게 진척되는 진도와 어마무시하게 주어지는 과제는 따라가기에도 버거웠고, 저에게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고, 어느새 다가온 설날과 함께 기숙학원에서의 월례고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설날 하루 전에 보았던 월례고사는 생각보다 평이했습니다. 국어, 수학, 영어 세 과목을 보았는데 그날따라 운이 따라줬는지 모든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무난하게 풀었습니다. 시험이 끝난 뒤 자연1반 친구들과 문제의 답을 맞춰보면서, 기대만큼 나와 준 가채점 결과를 보고 매점에서 조촐하게 파티도 했습니다. 월례고사 다음 날은 일요일이자, 설날이었기 때문에 월례고사 날 저녁에는 학원에서 휴대폰도 나눠주며 들뜬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학업에 집중하고자 휴대폰을 받지 않았고, 설날 당일의 아침 7시에도 퀀텀 라이브러리로 곧장 향했습니다.

그러나 설날 아침 7시에 도착한 퀀텀 라이브러리는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책상 위에 영어 일간지를 접어서 만든 허접한 쪽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쪽지는 지금 생각해봐도 귀여워서 웃음이 나오는데, ‘저녁 먹고 6시 40분에 회전 교차로에서 보자.’라고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누가 보낸 쪽지인지도 바로 가르쳐 주지 않고, 보낸 이의 좌석번호를 수학문제의 답으로 설정해 놓은 정성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문제도 간단하지 않았고, 평가원이 출제한 가형 시절의 미적분 30번을 변형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 푸는 데 한참이나 걸렸습니다.

설날 아침 7시에, 퀀텀 라이브러리 3층에서 자습하던 사람은 저와 K 두 명뿐이었습니다. 월례고사 바로 다음 날인데다, 설날이기도 했고, 일요일이었으며, 휴대폰도 나누어 주었는데, 굳이 나와서 아침자습을 하는 바보가 두 명이나 있었던 것입니다. 복도에서 감독하시는 생활지도 선생님 때문에 K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K는 어려운 문제에 고통 받는 저를 보면서 분명 즐거워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문제를 풀지 못해도 K가 쪽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자명했으나, 먼저 걸어온 싸움에 질 수는 없었기에 저는 풀이까지 정갈하게 써서 답을 도출해 냈습니다. 자연수인 분모(p)와 분자(q)를 더해서 답을 내었는데, 처음에는 이상하게 K가 아닌 다른 남학생의 좌석 번호가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기약분수라는 언급이 없었기에 p+q의 값을 여학생의 좌석번호 범위에 맞도록 설정하면 오직 한 명의 좌석번호만이 도출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K의 좌석 번호인 93이 나왔습니다.

곳곳에서 학생들을 감독하시는 생활지도 선생님의 눈을 조심스럽게 피해가면서, 저녁을 먹은 뒤에 저는 교회의 첨탑이 보이는 회전 교차로로 향했습니다. 정성스럽게 풀이까지 적어놓은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약간의 두근거림을 안은 상태였습니다. 교차로에 도착하자, 저와 같은 단체복을 입고 있었던 K가 추운 날씨에도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K는 저를 발견하자 따라오라고 손짓을 한 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앞장서 걸어갔습니다.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에 남녀가 결코 나란히 걸을 수는 없었고, 저는 몇 걸음 뒤에서 K를 천천히 따라갔습니다. 이윽고 K는 커다란 환기구로 가려진 뒤편의 산책로에서 걸음을 멈춘 뒤, 기숙학원에서 처음으로 저와 눈을 맞추었습니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에서는 하나둘씩 눈이 내려오고 있었고, 저는 그렇게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을 눈에 담았습니다.

여러 복잡다단한 일이 있었지만, 저는 윈터스쿨 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학습을 잘 마무리하고 23년 2월에 기숙학원을 나왔습니다. 2월의 봄방학에는 학원에서 배웠던 내용을 복습하고, 기출문제에 직접 적용해보면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때 조용하게 쌓아올린 노력은 결국 고3 때 빛을 발했고, 모든 면에서 저보다 뛰어났던 전교 1등과 간신히 겨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길 가망이 전혀 없었던 경쟁이었지만, 저는 ‘성취 = 재능 × (노력)^2’이라는 공식을 굳게 믿었기에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봄방학 시기의 저는 추천서를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일반전형에서 날고 기는 친구들과 경쟁하고자 여러 활로를 모색했습니다. 그때 절박하게 모색했던 활로가 예상치 못했던 추천서와 어우러져, 결과적으로 다른 지원자와 차별화되는 저만의 강점이 되어 주었습니다.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전화로는 떨떠름해 하셨던 Y의 어머니를 설득하러 부산까지 찾아갔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당시 저는 처음 보는 사람과 이야기도 잘 못했던 숫기 없는 자신이 너무 싫어서, 대담해지기 위해 집에 남아있던 소주를 냅다 병째로 마시고 부산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밤을 새가며 온갖 실험 데이터를 정리하고, 앞으로 진행하고자 하는 실험의 계획서를 세밀하게 준비해 갔지만 정작 Y의 어머니 앞에서는 준비한 만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Y의 어머니께서 내주신 30분의 시간이 끝나갈 무렵,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 계시던 Y의 어머니께 뭐라도 보여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저는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해버렸습니다. 반드시 1등으로 졸업해서 추천서를 거머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의대에 입학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순간 Y의 어머니는 표정을 싹 바꾸시며 크게 웃으셨고, 저를 보고 내뱉은 말을 지킬 수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술기운 덕분이었는지, 저는 Y의 어머니와 눈을 똑바로 맞추며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Y의 어머니는 이내 눈을 감고 잠깐 생각에 빠지시더니, 갑작스레 일어나셔서 저에게 악수를 청하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Y의 어머니와 손을 맞잡으며, 떨리는 마음을 뒤로 숨긴 채 마른침을 삼켰습니다.

23년 2월에 뵀던 Y의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시간을 아끼시는 차가운 태도와, 누구라도 긴장하게 만드는 카리스마를 갖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24년 1월에 뵀던 Y의 어머니께서는, 부산까지 찾아온 제자에게 회를 한가득 사주시고 용돈까지 챙겨주셨던 푸근한 은사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새삼스럽지만, 1년의 시간이 정말 많은 것을 변하게 했음을 깨닫습니다.  

시간은 다시금 쉬지 않고 흘러 봄방학도 어느새 끝이 났고, 저는 파란만장한 수험 생활의 보금자리였던 3학년 8반으로 첫 등교를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제가 가장 믿고 따랐던 선생님께서 담임이 되어주셨고, 재능과 여유가 넘쳤던 전교 1등과도 같은 반이 되어 선의의 경쟁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수험 생활은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를 노력만으로 넘어서기 위해서 끊임없이 도전했던 나날이었고, 예상치 못했던 일에 한없이 무너지고 힘들어했던 나날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께서 좋아해 주신다면, 고3의 이야기도 칼럼에서 다뤄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긴 칼럼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흥미로운 댓글과 메일을 써주시는 수험생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Appendix. ‘보리죽을 떠먹든 맛있는 빵을 먹든 누더기를 걸치든 보석을 휘감든 사랑하는 능력이 살아있는 한 세상은 순수한 영혼의 화음을 울렸고 언제나 좋은 세상 옳은 세상이었다네.’ 여러분께서 수험 생활 도중에도 부디 사랑하는 능력을 잃지 않으시고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